녹색성장 전략에 필요한 倫理的 보완점

한삼희

한삼희, 조선일보 논설위원

녹색성장(green growth)은 이명박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8년 8월 15일 ‘건국 60주년 경축사’에서 “저탄소 녹색성장은 녹색 기술과 청정 에너지로 신성장 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국가발전 패러다임”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녹색성장을 통해 다음 세대가 먹고살 거리를 만들어내겠다”고도 했다.

박근혜 정부도 녹색성장의 논리 자체는 부인하는 것 같지 않다. 박 대통령은 작년 9월 23일 유엔 기후정상회의 연설에서 “기후변화 대응을 새 산업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회로 인식하고 에너지 신산업에 적극 투자한다면 세계는 미래를 이끌어갈 새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대통령의 인식을 놓고 뭐라 하기는 힘들다. 두 분 다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을 잘 살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그래도 왠지 찜찜한 뒷맛이 남는다. 녹색성장을 하자고 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자고 그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녹색성장론의 특별한 강점을 하나 짚어둘 필요가 있다. 환경 진영과 경제 진영이 토론을 거쳐 합의에 도달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두 진영은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어법을 갖고 있는 것처럼 쌍방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녹색성장론은 이런 진영간 접근법 차이를 교묘하게 해소시켜 버린다. 환경 진영에 대해선 ‘환경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고 녹색성장을 해야 진짜 환경을 살리는 길’이라고 설득한다. 경제 쪽엔 ‘녹색성장 전략은 환경만 챙기자는 게 아니라 실제는 경제를 키우자는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녹색성장론엔 ‘상대 링에 올라, 상대 규칙대로 싸우면서, 상대를 설복시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녹색성장론에는 논리적 허점이 있다. 녹색성장을 구성하는 내용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핵심은 기후변화를 예방하고 그에 대응하는 에너지 관련 기술과 제도들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만일 녹색성장이 ‘부강한 국가’를 위한 전략일 뿐이라면,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본래 목표는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만일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기후변화 전략은 갖다 버려도 되는 것인가? 최근 정부가 유엔에 제시할 기후변화 실천 약속에 대해 경제계와 경제 부처들은 최대한 소극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너무 강한 정책을 쓰면 경제가 망가진다’는 논리다. 녹색성장을 해야 경제가 부강해진다는 말을 들어왔는데 정작 경제 주체들은 녹색성장이 경제를 망친다고 하고 있다.

필자는 녹색성장 전략이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윤리적 이유를 제시할까 한다. 그 논리가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면, 녹색성장론이 갖고 있는 앞서의 허점은 메워질 수 있다.

우선 온실가스의 세 가지 특징을 봐야 한다. ①확산성 ②축적성 ③불확실성이다. 확산성이란 이산화탄소라는 물질이 지구의 어느 위치에서 배출되건 순식간에 전 지구로 고르게 퍼진다는 특징을 말한다. 어떤 과학자는 ‘한 사람이 어느 순간 호흡 과정에서 뱉어낸 이산화탄소 분자들은 1년이 지나면 지구상 모든 곳으로 퍼져나가 지구의 어떤 나무든 광합성으로 이산화탄소를 들이킬 때마다 그 사람이 1년 전 호흡에서 뱉어낸 이산화탄소 분자를 몇 개는 들이키게 된다’고까지 설명한다.

이런 강력한 확산성으로 인해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 배출한 온실가스이건 세계 모든 국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산화탄소를 주로 배출해온 것은 북반구 온대 지역에 몰려 있는 선진국들이라는 점이다. 반면 그로 인한 피해는 주로 열대 지역 개발도상국들이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나 폭우-가뭄-허리케인 등 난폭해지는 기후의 피해는, 기후변화 대응 능력을 갖추지 못한 개도국들에 집중된다. 원인은 선진국들이 제공했는데 피해는 후진국들이 봐야 하는 구조다. 이걸 ‘공간적 비대칭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 선진국-후진국, 남-북 국가 간 갈등 구조가 생길 수밖에 없고 이것이 기후 문제 모순의 근본 구조다. 선진국 입장에선 돈을 들여 기후변화 억제책을 시행해봐야 나중에 그 덕을 보는 것은 개도국들이다. 개도국들은 기후변화를 일으킨 주범인 선진국들이 ‘후진국도 동참해 기후변화에 대처하자’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선진국들이 온실가스를 펑펑 내뿜어 자기들 경제를 키워놨으면서, 뒤늦게 선진국을 쫓아가겠다는 개도국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으로나 보일 것이다.

온실가스의 두 번째 특성은 축적성이다. 시카고대 데이빗 아처 같은 학자는 인간 배출 이산화탄소의 29%는 1000년이 지나도 대기 중에 남아 있고, 14%는 1만년이 넘어도 남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산화탄소는 수질오염 물질처럼 시간이 지나면 바다로 다 떠내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립장 쓰레기처럼 두고 두고 남아 골치를 썩인다. flow의 문제가 아니라 stock의 문제다.

축적성으로 인해 현 세대가 온실가스를 배출해놓으면 그 피해는 후손 세대가 보게 된다. 우리가 지금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로 우리가 현재 피해보는 부분은 별로 없다. 기후변화는 지금 세대 입장에선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남의 문제’인 것이다. 이걸 ‘시간적 비대칭성’이라고 하자. 이 역시 현 세대가 적극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처하게 만드는 걸 방해하는 구조다.

기후변화는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임계점(threshold)을 갖는다는 속성도 있다. 점진성이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각기 극미 수준의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나 하나 행동을 고쳐봐야 무슨 도움 되겠느냐’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다 기후변화의 충격(damage)은 서서히 일정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이기 보다는 대기 중 온실가스 축적량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서부터 급작스레 나타난다. 그 임계점이 언제가 될지는 불확실하다. 인간 인식의 한계 때문에 그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기후변화 문제의 절박성을 느끼기 힘들게 된다. 이런 이유들이 중첩돼 현 세대가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과 자기 책임의 무게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만일 지금 내가 배출한 온실가스로 100년 뒤 아프리카 국민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면, 거기에 대해 도덕적 책임감을 진지하게 느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구나 온실가스 문제는 원인과 결과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호주에서 캐낸 석탄을 국내에 들여와, 그걸로 전기를 생산한 후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최종적인 제품 소비는 미국 사람들이 한다면, 이산화탄소 배출 책임은 누구한테 있는 것인가?

‘공간적 비대칭성’은 그래도 당사자들(선진국과 개도국)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쨌든 협상이 가능한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시간적 비대칭성’의 양쪽 당사자(현 세대와 후손 세대) 가운데 어느 일방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현 세대와 후손 세대는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조차 없다. 현 세대의 방탕을 미래 세대가 견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선진국-개도국 갈등 보다도 현 세대-미래 세대의 이해충돌이 더 해소하기 어렵다.

온실가스 문제의 세 번째 특징은 불확실성(uncertainty)이다. 기온 상승은 인간 배출 온실가스 탓이라기보다 다른 어떤 자연적 요인 때문이 아닐까 하는 반론이 여전히 있다. 온난화 현상이 맞는다 하더라도, 그 피해는 우려 수준만큼은 아닐 거라는 주장도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모든 걱정거리를 한 방에 해소시켜 줄 획기적 신기술이 등장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도 있다. 이런 불확실성들이 기후변화 대응을 향한 일사분란한 전열을 갖추는데 방해가 된다.

현재까지 국제적으로 확립된 기후변화 대응의 기본 규칙은 ‘선진국 먼저 행동하기’이다. 이른바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y)’ 원칙이다. 이건 오염자책임 원칙(polluter pay principle)’에도 부합한다. 2012년까지 적용됐던 교토의정서가 이 원칙에 입각한 국제 합의였다.
‘선진국 우선 행동’은 산업국가들이 온실가스를 배출해 그 주된 피해를 개도국들이 입게 돼 있으므로 ‘문제를 일으킨 측에서 알아서 해결하라(you broke it, you fix it)’는 윤리 원칙이다. 개도국 입장에서 볼 때 선진국들은 온실가스를 배출해온 덕에 부자가 됐다. 선진국 국민들은 SUV도 타고 방마다 에어컨을 틀고 있다. 선진국의 이런 ‘사치 소비’ 때문에 가난한 나라의 ‘생존 조건’이 위험에 빠져 있다. 선진국이 사치적 소비를 억제해 개도국의 기본 생존권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윤리적 책임이다.
선진국들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인간 배출 온실가스가 기후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는데 왜 우리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하느냐’는 반론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야구 놀이를 하다가 실수로 남의 집 유리창을 깼다고 하자. 고의로 깬 것은 아니니 보상해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된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도덕적 비난은 말아 달라고 부탁해볼 수는 있겠지만, 피해 집단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진국 우선 행동’ 원칙에 입각한 교토의정서 시스템은 파탄이 났다. 기후변화의 ‘공간적 비대칭성’, ‘시간적 비대칭성’, ‘불확실성’의 세 특성이 작용한 결과다. 우선 각국 정부는 미래 세대의 이익을 정책 결정의 주요 고려 사항으로 삼지 않았다. 4년, 5년마다 선거로 뽑히는 정부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유권자들의 이익’이다.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미래 세대의 이익을 앞세워 행동하는 정부는 거의 없다. 장기적 관점은 뒤로 밀리고 단기적 국익에 대한 고려가 지배하게 된다.

기후변화는 ‘공유지 비극(tragedy of commons)’의 전형적 사례다. 모든 나라가 동시에 함께 협조하면 모두의 이익이 될 수 있지만, 세계 모든 국가를 단일 보조로 묶을 시스템은 마련돼 있지 않다. 대부분은 남이 솔선해주고 자기는 의무에서 빠졌으면 하는 무임승차(free riding)의 유혹에 빠져 있다. 서로 상대방을 믿지 못하면서 ‘나 혼자 온실가스 감축에 나서면 나만 손해’라며 상대에 책임을 미루는 비난 게임(blame game)을 해왔다.

대표 사례가 미국과 중국이다. 미국은 중국의 배출량 비중이 전 세계의 26%(2012년 기준, 미국은 16%)나 되기 때문에 중국 동참 없는 기후협약은 의미가 없다며 발을 빼왔다. 중국은 중국대로 ‘역사적 (1850~2007년) 누적 배출량에서 미국이 29%, 중국은 9%밖에 안 되는데 왜 우리까지 나서야 하느냐’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APEC 회의에서 오바마와 시진핑이 공동 행동의 합의에 이르면서 ‘post 2020 신기후체제 협상’의 큰 모멘텀을 만들어 놨다. ‘post 2020’ 체제가 교토의정서 시스템과 근본에서 다른 점은 선진국만 아니라 개도국까지도 동참시킨다는 것이다.최근엔 ‘거대 개도국’과 ‘신흥도약국’의 부유층-중산층을 참여시키지 않고선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됐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중국은 여전히 개도국으로 분류되지만 최상층 1억 명의 소비 수준은 선진국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중국 부자들이 세계의 백화점을 휩쓸고 다닌다. 한국 같은 신흥 도약국의 부유층도 선진국의 하층 계급보다 훨씬 유복한 소비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거대 개도국과 신흥 도약국의 부자들은 자국의 ‘평균 배출량’ 통계의 뒤에 숨어 온실가스 감축 의무에서 면제돼 있었다. 이런 모순은 미국인들이 ‘중국 수퍼 리치들도 참여 안하는데 왜 미국 빈곤층까지 의무를 져야 하냐’, ‘중국 동참 없이 어차피 기후변화 해결은 불가능한 것 아니냐’ ‘우리는 과거에 모르고 배출했지만 중국은 알면서도 펑펑 배출하고 있지 않나’며 버틸 근거가 됐다. 지금 유엔이 추진하고 있는 ‘post 2020’에선 선진국들이 선도적 행동에 나서되 개도국도 일정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선진국-개도국의 이해충돌 해소 규칙이 유연해진 것이다.

과학적 불확실성은 기후변화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핵심 장애물이다. 기후변화가 사실인지, 그게 얼마나 큰 피해를 몰고 올지가 불확실한데 경제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대책을 서둘러 실행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강력하다. 불확실성을 감안해 당장 획기적 대책을 실행하기보다 서서히 강도를 높여가며 불확실성을 해소시켜 가자는 ‘wait & see’ 전략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우선 경제 성장에 주력한 후 후손들이 부자가 되고 나서 그들의 경제력을 갖고 대처하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논리를 내놓기도 한다.

과학적 불확실성이 있는 건 틀림없는데 그것이 빠른 시일 내 해소될 가능성은 없다. 어차피 100% 확실한 건 없기 때문에 논란과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다. 문제는 대처가 늦으면 늦을수록 드는 비용은 더 많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불확실성이 인간에 유리한 쪽으로만 작용한다는 보장도 없다. 생각보다 더 강력한 피해가, 더 빨리 찾아올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불확실성을 해소할 입증 책임이 누구한테 있느냐는 문제도 따져봐야 한다. 기후변화는 선진국들이 일으켰는데 피해는 개도국 취약층들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그 경우 선진국이 후진국을 향해 ‘기후변화가 당신들을 궁지로 몰 것이라는 걸 당신들이 확실하게 증명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마치 남의 집 유리창을 깨놓고 나서, 바로 그 직전에 유리창 앞에서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는 걸 본 사람까지 있는데도, ‘내가 유리창 깨는 걸 녹화한 CCTV라도 있냐. 그런 증거가 있다면 보상해주겠다’고 버티는 것 비슷하다. 윤리적으로 볼 때 가해자 쪽이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입증할 책임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면 경찰은 단속을 한다. 음주운전을 한다고 반드시 사고가 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음주운전 사고는 공연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따라서 경찰은 음주운전이 남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보고 예방 단속에 나서는 것이다. 이것이 상식에 입각한 법 체계다. 기후변화의 불확실성 문제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논거는 ‘기후변화 대책은 기후변화론의 과학적 사실 여부를 떠나 다른 이유에서라도 실행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17세기 프랑스 수학자 파스칼은 사람들이 ‘신을 믿어야 됩니까, 믿지 않아도 됩니까?’하고 묻는 데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는 도박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도박에선 신이 있다는 쪽에 거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만일 신이 없는데도 신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행동할 때 우리가 잃는 것은 매주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몇 시간 정도씩의 손실에 불과하다. (반면 교회에서의 사회관계를 통해 상당한 부수적 이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신이 있는데도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나중에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신이 있다고 전제하고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기후변화가 별 것 아닌 것일 수도 있고 굉장히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 만일 기후변화가 별 것 아닌데도 심각한 것으로 보고 태양광-풍력 같은 저탄소 에너지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을 때 우리가 잃을 것은 별로 없다. 화석연료는 결국 고갈될 것이다. 기후변화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우리는 대안 에너지를 찾아야 한다. 반면 기후변화가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주게 되는데도 별 것 아니라고 손 놓고 있다가 나중에 실제 재앙에 직면하게 되면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녹색성장론이 ‘기후변화는 어떻게 되든 관심 없고, 어쨌든 경제에 득이 될 것이므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심각한 윤리적 허점을 노출하게 된다. 기후변화가 인류 상당수에 결정적 위해를 가하는 지구적 위기를 불러올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면, 기후변화를 막거나 그에 적응하기 위한 투자는 단순히 투자국 스스로의 득실만 갖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설령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 이론에 불확실한 부분이 적지 않게 남아 있더라도, 기후변화 대책은 언젠가 닥칠 화석연료 고갈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가야 할 길이다. 녹색성장론에 대해서는 경제적 득실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 측면에서의 본질 부분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신흥 도약국 위치에서의 책임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면서 녹색성장의 깃발을 흔들어 녹색기후기금까지 유치해놓고서, 이제 와 경제에 줄 부담이 과도할지 모른다면서 주저주저한다면 다른 나라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는가. 녹색성장이 단기적으로는 경제에 충격이 된다 하더라도 중-장기적으로 경제 체질을 개선시켜준다는 주장도 강력하다. 이런 관점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균형 있는 판단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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